초기 한국천주교회 수난사

《철종 시대의 교회 발전)》/교회의 발전, 다블뤼 주교의 업적

하늘나그네 2011. 9. 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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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사진및순례기] 방 [필구 아오스딩]님이 올리신
74번 글/<신리성지> 중에서 옮긴 사진과 사진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곳은 다블뤼 주교가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전라도 강경
황산포에 첫걸음을 내딛은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기까지 21년간
지내셨던 장소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안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됐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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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 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됐다.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낮이면 문을 잠그고 숨어서「한불사전」, 「한글문법」, 「불한사전」,
「달레의 천주 교회사」의 기초가 된 자료수집, 문헌 번역,
순교자 행적을 기록하였다.


       철종 시대의 교회 발전
                                    
  -  2시간에 쉽게 읽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

3. 교회의 발전

이후 조선교회는 어느 정도 태평이 계속되어 『십이단』,『교리 문답』
같은 책을 만들어 외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고 다블뤼 신부는
『한불자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페레올 주교의 선종으로 인해 주교 대리를 하던 매스뜨르 신부는 사회
사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여 버림받은 아이들을 모아 각 지방의 교우
들에게 맡기어 기르게 하였고, 
서울에서는 매달 8냥씩 월급을 주는 유모들을 구하여 고아를 구제하게
되니 죽어가던 많은 아이들이 앞을 다투어 입교하게 되었다.
1855년에 기록된 교우 수는 13,638명이었다. 이후 공석 중이었던 조선
교구장으로 만주 교구에 있던 베르뇌(시메온) 주교가 임명되고, 쁘띠니
꼴라 신부와 쁘르띠 신부 등 2명의 불란서 성직자도 추가로 조선에 파견
되어 이 세분의 성직자는 1856년 3월 같이 배를 타고 몰래 황해를 건너
서울로 잠입하였다.
1857년 3월 25일 11년 동안 조선에서 봉사해온 다블뤼 신부가 부주교로 
오르는 승품식을 받게 되었다. 이 승품식은 마치 로마시대의 지하실 무
덤 옆의 성당에서 지내던 것과 같이 남모르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주
교댁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자리에은 매스뜨르신부, 쁘띠니꼴라 신부,
최양업 신부와 서울의 전교회장 및 교우 몇 명만이 참가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1855년 제천군 베론에 신학교(성요셉 신학당)을 세우고
다블뤼 신부를 학장으로 삼아 매스트르 신부, 쁘르띠 신부와 함께 10여
명의 신학생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 제천은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숨어
서 백서를 지은 고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성교회는 주교, 부주교 및 4명의 프랑스 신부와 1명의 
조선 신부 신부가 있고 신학교가 있는 어느 정도 체재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천주교는 양반과 왕의 친척에까지도 전파되었고 이때부터 외인들
사이에서 종래 <천주학>이라고 부르던 말을 대신하여 「성교」(聖敎)
La Sainte Religion라 부르게 되었고 회장이라는 말도 흔히 쓰게 되었다.

4. 다블뤼 주교의 업적

1845년 김대건 신부와 같이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극심한 위장병과 오른쪽
무릎의 류마티즘, 심한 시력 감퇴 등의 질병을 겪으면서도 전국을 다니며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1850년에는 중병이 들어 병자성사를 받았다가 회복되기도 하였다.
『영적 생활의 첫 걸음』이라는 훌륭한 묵상집과 세례, 통회, 성찰에 관한
소책자들을 썼고 『주일기도책(공과)』를 번역하엿다.
다블뤼 주교는 처음으로 『한·불 자전』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개편하여 『한·중·불 자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유년과 그 이전의 박해 기록이 자세하지 못함을 알고 10년 간을 
지방으로 다니면서 교우들에게 그 사실을 묻고, 증거를 얻어 150여명의
순교자 전기를 7권으로 기록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이 자료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1862년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내 보존시켰다.
그 다음 해인 1863년 그의 집에 불이 나 모든 자료가 다 타버리게 되었
으니 만일 외방전교회로 보낸 책이 없었더라면 조선 순교자의 역사는 
자세히 엮어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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