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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 대 박해(1866~1878)
- 2시간에 쉽게 읽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4. 병인박해의 경과병인박해는 한 시기에 끝난 것이 아니고 연관되는 4사건으로 인하여 반복되며 큰 피해를 초래하였다.① 1866년 봄. 러시아 침입을 물리치려는 문제로 시작되어 일어난 것 ② 1866년 가을. 프랑스 함대의 침입 후 일어난 것(병인양요). ③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 무덤 훼손 사건으로 발생한 것. ④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신미양요).① 1866년 봄의 박해러시아 침입 사건이 조용해지고 1866년 구정이 지나자, 베르뇌 주교의 하인이던 이선이, 최형(베드로), 전장운(요한)을 잡아들이고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뤼 신부, 도리 신부가 잡혀 1866년 3월 8일 새남터에서 같이 교수형을 당하였다. 같은 날 남종삼(요한), 홍봉주(토마스)도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고 다음날 전장운(마태오), 최형(베드로)가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제천 신학교에 있던 쁘르띠, 쁘띠니꼴라 신부와 정의배(마르코), 우세영(알레시오)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의 유해는 묻었던 자리를 멀리서 확인 해 두었다가 박해가 어느 정도 뜸해진 9월에 남은 재산이라고는 가락지 밖에 없던 가난한 교우들이, 그 가락지를 팔아 널빤지를 마련한 뒤 40여명의 교우가 밤에 새남터 이곳 저곳을 헤쳐 성직자 머리와 시체를 찾아 맞추어 와우고개(지금의 용산 우체국 뒷 고개)에 묻었다. 이들의 유해는 1899년 10월 용산신학교로 옮겨졌고 1900년 9월 명동성당 지하묘소로 모셔지게 되었다. 다블뤼 주교도 3월 11일 내포에서 자수하였고 다블뤼 주교의 권고에 의해 유앙 신부, 오매뜨르 신부도 자수하여 주교와 운명을 같이 하였으며 다블 뤼 주교의 복사이던 황석두(루까)도 주교를 죽을 때까지 따라가겠다며, 놓아주는 것을 마다하고 주교를 다라 감옥에 갇혔다. 또 베론 신학교 집주인이던 장낙소(요셉)도 소를 타고 잡혀가던 신부의 뒤를 따라가 감옥에 갇히었다. 이들은 당시 고종이 병을 앓고 있었고 혼인날도 얼마 안남아 있어서 사람 의 피를 서울 땅에서 흘리면 혼사에 해롭다하여 250리 떨어진 충청도 보령의 바닷가(갈매못)에서 처형당하였다. 다블뤼 신부는 21년 동안 한국에서 피의 전교를 하였고 순교자의 일기와 많은 교리책을 만들어 냈으며,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 부주교를 역임하였고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후, 21일 동안을 조선 교구의 제 5대 주교로 있다가 순교하였다. 유앙 신부는 죽으며 "젊어서 죽음을 겁내지 않고 원통히 여기지 않으나, 다만 외인들을 위하여 아무 일도 못한 것을 원통히 여긴다."라 하였다. 이들 성직자의 유해는 1900년 9월 명동 주교좌 성당의 지하실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 외에 오판지(바오로), 홍 히야신타, 손자선(토마스), 김 수산나 등의 순교기록이 있고 20여명의 교우가 더 순교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성교의 책을 다 불살라 버리게 하고 오가직통법을 다시 실시 하여 샅샅이 교우를 찾아내도록 하였다. 한편 조선에 남아 있던 3신부 중 연장자인 페롱 신부와 깔래 신부는 조선에 계속 남아 지키기로 하고 제일 나이 어린 리델 신부로 하여금 청국으로 탈출하여 조선교회의 사정과 순교 사실들을 알리고 새로운 성직자를 보내주도록 요청하게 되었다.몇 달 후 페롱, 깔래 두 신부도 교우 몇 명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있다가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며 불살려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② 프랑스 함대의 침입과 (병인양요) 이에 따른 박해1866년 봄의 1차 교난이 지난 후 잠잠해질 무렵 1866년 10월 프랑스 군함 7척의 전단이 들어와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성직자를 죽인 책임을 묻게 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고관들에게 4가지 사항을 피로써 맹세하여 실천하도록 지시하였다. 즉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화친하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고, 해독을 찾이 못하여 통상을 허락하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고, 적군이 서울에 가까이 오매 도망하면 이는 나라를 위태 롭게 하는 것이고, 육갑 같은 괴술로 귀신을 불러다가 적을 물리친다 하여도 뒷날의 그 폐해는 천주교보다 오히려 더 심할 것이니 최선을 다하라는 것' 것이다. 프랑스 함대는 40여 일을 머물다가 조선 정부와의 교섭이 도저히 불가 능하고 또 겨울이 오면 강이 얼어 배가 다닐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소득 없이 프랑스 군함이 물러가자 교우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져서 조정은 교우를 빠짐없이 잡도록 명령하고 20명 이상 교우를 잡은 자는 좋은 직위를 준다고 하였으며 이용래, 원후정, 박성은, 이제현 등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의 국토가 순교자의 피로 얼룩졌다는 사실이 온 세계에 알려져, 모든 나라의 신자들이 조선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고 로마 교황 비오 9세는 1866년 12월 19일 조선교회에 교서를 보내 위로하고 격려하였다.「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강복한다. … 이 일을 들으니 눈물이 흐르 도록 마음이 슬퍼진다. … 성교회에 순교의 영광이 새로 일어나고 순교 자의 피에서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며 또한 너희들을 부러워한다. 우리는 십자가로써 세상을 쳐 이기신 천주의 아들이 아니더냐. 저들과 같이 고난을 참아 받고 오직 예수를 위하여 능욕을 받음을 기뻐하고, 옳은 일을 위하여 박해를 이기어 순교하는 사람을 위하여 예비하신 천국의 높은 자리를 바라보아라. 우리는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으나 기도로써 도아줄 것이다….」
③ 오페르트의 내항과 남연군 묘 훼손 사건한편 중국으로 피신해 있던 페롱 신부와 교우들은 독일상인 오페르트를 만나게 되었다. 유태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수 차례에 걸쳐 조선을 탐험하면서 조선과 통상을 함으로써 큰 이득을 얻더보고자 하던 자였다. 이에 조선 교우들의 요청에 의해 페롱 신부는 오페르트에게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하였다.“대원군은 대단한 미신을 갖고 있어 몇 개의 유물을 아버지 남연군의 묘 속에 감추고 있다. 대원군과 그의 가정의 행복은 이 유물을 갖고 있는데 달려 있다는 소문이 있다. 이 유물을 잠시나마 점령하는 것은 마치 서울 전체를 점령하는 것과 같아서, 대원군은 이를 다시 찾기 위하여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 곧 외국에 문호를 개방할지 모른다.” 이 제의를 들은 오페르트는 1천 톤의 기선 탸이나호를 타고 최선일 요한 등 몇몇 교우와 함께 1868년 아산만에 도착하였다.그들이 남연군의 묘를 찾아내 허물기 시작하였으나 그 묘지가 의외로 단단한 돌덩어리로 되어 있어 10여 시간을 애쓰다가 썰물시간이 다되어 포기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 일이 일어나자 조정은 크게 노하여 이번 변란도 사학의 무리가 계획한 것이라 하여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8년 4월부터 이르는 8개월 동안 170여명의 교인들이 잡혀 처형되었다. 이 때 이승훈의 아들 이신규와 그의 손자인 이재의, 권철신의 증손 권복 등도 순교하였다. 한편 일본은 1858년부터 서양의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고 전교의 자유를 인정하였으며 1868년부터는 천황 정치를 복구 하여 날로 발전하고 있었다.
④ 미국 함대의 침범과 이에 따른 교난(신미양요, 1871년).1871년 5월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5척의 배와 1230명의 군인을 태우고 강화도를 점령하며 통상을 요구하고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책임을 묻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함대는 20여 일 간 머무 르다 아무 효과가 없자 할 수 없이 편지만 남기고 귀항해 버렸다. 이에 대원군은 종로 네거리와 전국 도읍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오랑캐가 침범한때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우리 자손은 경계하라"라는 글을 새기게 하였다. 신미양요 후 조선에서는 미국 배를 물리쳤다하여 더욱 기뻐하였고 조선교회는 마치 기름 짜는 틀에 넣었듯이 참혹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당신 조선 교우의 편지에 의하면,“교우들의 형편은 더 말할 수 없이 비참하게 되었다. 역적으로 몰리고, 배반자로 쫓기고,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다른 지방으로 도망가려 하여도 새로운 법이 생겨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은 먼저 관리에게 조사를 받게 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박해자들은 배교자의 밀고에 따라, 교우 중에서 학식 있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이름난 교우들은 모두 죽였다. 서울과 큰 도시에서는 성교에 관계되어 잡힌 사람은 문초함이 없이 바로 죽였다. 칼로 목을 베는 것이 더디다 하여 대들보 두 개를 위아래로 매달고 그 사이에 20~25명의 교우를 한꺼번 에 끼워 넣고 위의 대들보를 내리눌러 한꺼번에 죽게 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넓고 깊은 구덩이를 파놓고 많은 교우들을 잡아 다가 산채로 매장하기도 하였다.”
달래의 『조선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1866년부터 1870년까지 순교한 사람의 수가 8천명을 헤아린다고 하니, 신미양요 후에 생긴 순교자까지 합치면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순교자가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여기에는 산 속에서 굶주림과 고생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병인박해 이전의 교우수가 2만 3천 여명 이었다고 하니 거의 반 이상이 순교한 셈이다. 한편 대원군은 10여년 동안 학정을 계속하다가 최익현의 상소와 민비의 오빠인 민승호 등의 주장에 의해 1873년 말에 권좌에서 물러나 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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