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천주교회 수난사

《조선의 문호 개방》/리델 주교와 최지혁(요한),달레신부의 『조선교회사』

하늘나그네 2011. 9. 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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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호 개방

                                    
  -  2시간에 쉽게 읽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

1. 리델 주교와 최지혁(요한)

교황청은 1868년 4월 27일 리델 신부를 조선교구의 제6대 주교로 임명하였다.
1876년 2월 27일에는 강화도에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고 1876년 5월에는
10여 년 간 목자없던 조선교회에 다시 블랑, 드게뜨의 두 신부가 서울로 
숨어들었다.
이 두 신부를 백령도에서 서울로 맞아들인 교우는 10여년 전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피난시켰다가 귀국한 유명한 노인학자 최지혁(요한)이었다.
최지혁(요한)은 병인년 박해 때 아내와 6남매의 자녀가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리델 신부를 모시고 청국으로 건너갔었는데 그 사이 
그의 가족은 모두 순교하게 되었었다.
1877년에는 리델 주교가 드세(Doucet), 로베르 신부와 함께 청국배를 타고 
장연 앞 바다에서 최지혁(요한)을 만나 서울로 잠입하였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리델 주교는 밀사 최치화,오치옥으로 하여금 리델 주교와
최지혁(요한)의 편지를 갖고 만주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 코스트, 뮈텔 신부
에게 전하려고 하였는데 이 밀사가 국경에서 잡히엇고 무서운 고문에 모든
것을 자백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1878년 1월 28일 리델 주교는 최지혁과 함께 잡히게 되었다.
이때 주교 대리 역할을 하던 블랑 신부가 긴급히 조선교우를 밀사로 보내
이 사실을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알리고 구제할 방법을 부탁하였다.
북경 주재 공사와 북경 주교는 이 문제를 갖고 총리아문 대신인 이홍장을 
찾아가 조선주교 리델을 청국으로 보내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게 되어 
리델주교는 5개월 간 옥살이를 한 후 만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리델 주교와 같이 잡힌 최지혁은 전혀 도움을 못받고 1878년 7월
14일에 옥사하였다.최지혁(요한)은 글씨를 잘 쓰는 학자였었는데 1866년 
이래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성직자의 재입국을 활발히 준비하였었다. 
리델 신부가 1880년 출판한 『한불자전』,『한어문전』의 한글체 대.중.소의
모형은 모두 최지혁(요한)의 글씨체로 하였었다. 이 두 책은 우리말의 사전
과 문법책으로 처음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 문화를 서양에 소개한 귀중한
저서들이었다.

2. 달레(Dallet)신부의 『조선교회사』

조선교구로부터 비참한 소식이 계속 파리로 보내져오자 외방전교회 본부는
이 자료를 수집 편찬할 필요을 느끼게 되었다.
조선교회가 조선인들의 힘에 의하여 창설된지 87년째였고 파리외방전교회
에서 조선교구를 맡은지 41년째 되는 해였으며 24명의 프랑스 성직자가
가서 그중 12명이 박해로 순교하였고 네 번에 걸친 큰 박해로 중국인 신부
1명, 조선인 신부 1명, 조선교우 만여 명이 순교한 놀라운 역사였던 것이다.
당시 43세였던 달레 신부는 1872년부터 2년간 자료를 모아 1170면의 큰 책 
『조선교회사』를 2권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서양의 성직자가 나가기 이전의 자료는 대부분 다블뤼 주교가 모은 자료에
의존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21년간 한국에 있으면서 1856년부터는 베르뇌 
주교의 명령으로 특히 초기 순교자의 자료를 전국을 누비면서 수집하여
10여년 동안 7권이나 되는 교회사료를 모았고 이를 최양업 신부 등과 더불
어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냈었던 것이다.
다블뤼, 베르뇌 주교들이 순교한 이후는 리델 주교, 페롱, 깔래 신부 및 
조선교우들의 편지 속에서 자료를 얻어서 조선 교회사를 편찬하였다.

3. 한미수호조약의 체결

미국은 1880년 5월 해군 제독 슈펠트가 부산에와 일본영사를 거쳐 국서를
전달하며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었다.
이에 슈펠트는 8월 중국 진천으로 가 총리아문 대신 이홍장을 만나 조선과
미국이 국교르 체결할 것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니 이홍장은 조선에서의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를 받아들여 1882년 5월 22일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4. 한프랑스 조약의 체결

1886년 5월 6일 불란서의 전권대신 코고르당이 서울에와 조선의 집권대신
김 식과 교섭하여 1886년 6월 4일 드디어 한프랑스수호조약이 맺어지게 
되었다. 
이 후 프랑스 성직자들도 지난 50여 년간 쓰고 다니던 방갓(천사의 외투
라고도 불리었음)을 벗어버리고 검은 신부복을 입고 다니며 자유로이 
전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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