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천주교회 수난사

《철종 시대의 교회 발전)》/조씨 세도의 몰락, 최양업(토마스) 신부

하늘나그네 2011. 9. 8.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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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시대의 교회 발전

                                    
  -  2시간에 쉽게 읽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

1. 조씨 세도의 몰락

안동김씨로 부터 세력을 빼앗고 천주교를 박해하던 헌종 임금의 외조부
되는 조만영 1846년 죽게 되면서 풍양조씨의 몰락이 시작된다.
헌종도 아들이 없이 1849년에 사망하자 왕궁에서 가장 높은 어른인 
김 대왕대비(순원왕후)가 옥쇄를 차지하며 신유박해 때 천주교에 연루
되어 강화도에서 사형된 은언군의 손자를 철종으로 앉히고 3년간 다시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이후 풍양조씨는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천주교에 대해 동정의 뜻을 
보이던 안동 김씨가 다시 세도를 잡으며 천주교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를 묵인하게 되었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가난한 농사군의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1850년에 페레올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장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교우의 총 수는 1만 1천명이었고, 공소는 185 곳이 있다고 되어있다.

1. 최양업(토마스) 신부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유학간 지 13년만에 신품을 
받고 다음 해 1월 조선으로 들어왔다.
최 신부는 1861년 6월에 병으로 선종할 때까지 12년간을 전국을 
수없이 다니며 전교에 힘썼고, 특히 서양인 신부가 다니기 위험한
지방과 산골을 주로 다녔다.
제천 배론에 있던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가르쳤고 순교자의 사료모집
과 교리 문답책 번역 등에 크게 이바지하고 베론에 묻히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를 피의 증거자라고 부르는데 반해 그는 땀의 증거자라고
지칭되고 있다.
교황청은 2004년 3월 최양업 신부의 시복사업을 정식으로 허가하고 
제반 조사과정을 학국교회에 위임하였다.
조선의 3대 주교이던 페레올 주교는 1853년 2월 3일 45세로 선종하였고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안성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님의 무
덤 옆에 안치되었다.
페레올 주교는 입국 후 8년 동안 전교사상 큰 공적을 남기고 과로로 선
종하였으며, 그는 조선 땅에서 천명을 다 살고 선종한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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