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천주교회 수난사

《병오박해(1846년)》/김대건 신부의 순교,현석문(가롤로)과 다른 7 순교자

하늘나그네 2011. 9. 8.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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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박해(1846년)

                                    
  -  2시간에 쉽게 읽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

1. 김대건 신부의 순교

김 신부가 체포될 당시 같이 잡힌 2명의 교우는 모진 고문에 못 이기어
김신부가 살던 서울 집을 알려주고 이재용(토마스)을 비롯한 여러 교우
들을 알려주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6월 21일경 서울 포도청으로 끌려와 한 달 동안 40여 차례
의 형문을 받게 되었고 현석문9가롤로) 등 20여명이 잡히게 되었다.
김 신부는 어두운 감방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을 받고 세계 지리의 개략을 
책으로 만들고 영국서 만든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두벌의 지도를 색칠까지
하여 만들어 바쳤고, 그중 한 벌은 헌종에게까지 바쳐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정부의 대신들 중 몇 명은 김 신부의 고결함과 외국 지식,4개 국어에
능통함을 들어 임금에게 구명을 청원하였고 이 때문에 김신부의 판결은 3
개월을 끌며 결정되지 않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은 3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충청도 앞 바
다에 와서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성직자가 순교한 것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다가 싱겁게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영의정은 법에 따라 김대건을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면 조선의 연약함
을 보이는 것이고, 장차 분규의 구실을 남기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나라에 
대한 반역,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건의하게 되
었다. 김 신부의 사형은 1846년 9월 16일 세명의 프랑스 성직자들이 피를
흘린 한강 새남터에서 집행되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통한 것은 오직 종교를 위해서입니다.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그 천주를 위하여 나는 죽어갑니다. 여기서 영원 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고자 생각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천주는 당신을 업신여기는 자에게 끝없는 괴로운 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희광이 12명이 돌아가며 치는 여덟 번째의 칼날에 김 대건 신부의 머리는 앞쪽으로 떨어졌다. 판관의 명에 의해 잘려진 신부의 목을 그 몸체에 붙여 매고, 자주빛 조끼와 무명바지를 입히고 멱서리로 싼 뒤,굵은 새끼로 동여 매여 새남터의 구덩이 속에 묻어버렸다. 순교 후 14일 정도 되어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안성 미리내의 이민식 (빈첸시오)등 젊은 교우 십여명은 어두운 밤을 틈타 신부의 시체를 파내어 서울로부터 150리나 떨어져 있는 미리내 산으로 옮겼다. 그 후 그의 유해는 용산의 천주교 신학교 성당과 용산 성직자 묘지및 혜화 동 소신학교를 거쳐 1960년 가톨릭 대학교 신학원 성당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103위 한국 성인의 축일 공식명칭을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3위 동료순교자>로 하여 그를 가장 앞세웠다.

2. 현석문(가롤로)과 다른 7 순교자

병오년 고냔으로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현석문 가롤로를 포함한 8명의 
교우가 순교하게 되었고 이들 모두가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현석문의 죽음으로 그의 가족은 모두 끊기었는데 그의 집안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모두 증거자 아니면 순교자였다. 
    1. 현석문(가롤로) 2. 임치백(요셉) 3. 우술임(수산사) 4. 이간난(아가다) 5. 김임이(데레사) 6. 정철염(가타리나) 7. 남경문(베드로) 8. 한이형(라우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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