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천주교회 수난사

《首先鐸德 김대건 신부》/조선 교회의 비참한 모습,압록강 탐험,페레오 주교,체포

하늘나그네 2011. 9. 8.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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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탁덕(首先鐸德) 김대건 신부

                                    
  -  2시간에 쉽게 읽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

1. 조선 교회의 비참한 모습

기해 대 박해 때 배교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석방된 교우도 많았으나 
그들은 대개는 입으로 만의 배교였고 관리들도 교우들을 놓아주면서 
"저들이 입으로는 배교한다고 하나 본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고 있다."
고 하였다.
교우들의 마을은 뿌리째 뒤집혀서 남은 사람들은 먹을 것은 물론 집과 
재산을 압수 당하고 정처 없이 헤매게 되었다. 신유박해 후와 같이 
교우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차츰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관리들은 천주교가 뿌리째 없어진 줄 알았으나 박해의 덕분으로 
위로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는 옥졸에 이르기까지 천주교의 교리를 대강 
들을 수 있었고 국민들도 순교자들이 남긴 사랑의 따뜻함과 정결함,
놀라운 참을성에 대하여 탄복하며 그들을 칭찬하게 되었으니 이러한데서
천주교는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2. 김대건 신부의 가문

증조부인 김진후(비오)는 충청도 내포의 명문가로서 50세에 아들의 
권고로 입교하여 여러 차례 고난을 겪은 뒤 1814년 10월 해미 
옥에서 선종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이냐시오) 성인은 솔뫼에서 아내
이던 우르술라 사이에서 1821년 8월 21일 김 신부를 출산하였다.
아버지 김제준 성인은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3. 유학과 압록강 지대 탐험

모방 신부는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에 유학 보냈으나 최방제(프란
치스코 사베리오)는 병사하였다.
김대건은 신학생 때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만주로 건너와 조선으로
들어가 보려는 게획을 세우고 국경에서 20여리쯤 되는 곳에 도달하
였을 때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 일행 중에 있던 조선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다.
김대건은 그로부터 기해박해 후 조선의 사정과, 그의 아버지는 순교
하였고 어머니 우르술라는 거지가 되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교우들의 동정을 받아 겨우 연명한다는 것, 최양업 신학생의 부모도
순교하였다는 비통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잡히기 전까지 기록하던 순교 행적, 모방, 샤
스땅 신부의 마지막 편지 및 새로이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조선 교우
들의 탄원서를 넘겨받았다.

4. 페레올 주교의 취임과 입국

앵베르 주교가 순교한 후 페레올 주교가 1843년 12월 만주에서 베롤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고 조선교구의 제3대 주교로 취임하였다.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황해 
바닷길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는 경로를 탐험하고자 서울로 들어왔다.
그후 그는 현석문 등 11명의 교우와 함께 작은 배를 구해(입국한 바닷
길을 개척하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상해로 다시 귀환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근처의 긴가함(긴가함)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신품성사를 받았다. 조선교회 창설 
60여 년 만에 우리 겨레로서 처음으로 신부가 된 것이다.
그 후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그리고 그를 
따라 상해까지 온 교우들과 함께 라파엘 호라 이름 붙인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조선의 강경리 나바위라는 조그만 교우촌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이 때가 1845년 10월 12일이었다.

5. 김대건 신부의 체포

김대건 신부는 반년동안 조국의 사제생활에서 혁혁한 공덕을 남겼다.
지금까지 외국인 신부한테만 성사를 보았던 조선 교우들은 이제 말과
생각, 핏줄이 통하는 이 신부를 얼마나 감사히 여기고 자랑했으며
흠모하였던가.
김 신부 또한 침착함과 열성, 능변으로써 마음을 사로잡고 신덕으로서
표양을 보이며 얼마나 교인을 아끼고 위로하며 사랑해 주었던가.
한편 페레올 주교는 만주에 있던 매스뜨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어떻
게 하던지 조선으로 맞아들이려고 김 대건 신부로 하여금 뱃길을 알아
보라고 다시 지시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4월 8일 교향 은이공소에서 마지막 미사를 올리고, 10여
년간 헤어져 있다가 잠시밖에 같이 지내지 못한 한 많은 어머니 우르술라
를 뒤로 한 채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김대건 신부는 매년 음력 3월에서 5월 사이에 조기떼를 잡기 위해 연평도
쪽으로 다가오는 청나라 어선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1846년
5월 어선을 타고 마포를 떠나 백령도 부근에서 그물을 치고 있던 청국 배
중 한 배로 접근하여 대화를 통해 그가 믿음직한 사람임을 확인한 후,
주교의 편지와 조선지도 및 황해도 앞 바다의 지도를 중국의 매스뜨르
신부에게 전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가 탔던 어선이 조기를 말리느라 며칠 간 지체할 때,
조선관리들이 다가와 이 배를 빌려달라고 하였고 김대건 신부가 나서서
거절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반감을 품은 포졸들이 김대건 신부에 대해 의심을 품고 
김 신부를 폭행하여 옹진군의 옥으로 구속하였다(1946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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