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지혜 성인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하늘나그네 2011. 6. 2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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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요한Ⅰ서 4,7-8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 Ⅰ고린토 13,4-7


성서는 인간존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쳐준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랑의 모상을 반영할 때까지 우리는 참다운 우리자신이 될 수 없다.

러나 우리는 실제로 사랑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우리들은 일생동안 몇 사람을 깊게 사랑할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나 배우자, 아이들, 혹은 친구들이 그 소수의 사람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중문화는 어디에선가 “우리 삶의 사랑”이 될 한 사람의 존재를 찾는 것과

이러한 사랑들을 비교해 보도록 만든다.

 

그러나 성인들에 의하면, 사랑에 관한 더 큰 잣대가 있다.

 

사랑하고 사랑 받고자 하는 갈망보다 우리 존재에 더 깊숙이 새겨진 것은 없다.

노래나 시, 심지어 인사카드에도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다만 사랑뿐”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성인들은 사랑을 단지 “우리 마음의 갈망”이 만족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성장과 회심의 한결같은 과정으로 이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우리갈망의 만족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역량이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테가 표현하듯이 사랑과 일치되어 “태양과 별들을 움직여야 한다.”

 

지상에서 우리의 과제는 사랑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취하면 우리의 삶이 길든 짧든, 우리는 우리존재의 목적을 실현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성인들의 행복을 달성하는 것이다.

14세기 영국의 신비가인 리챠드 롤은 성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 속에서 환희를 맛 볼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사랑이 순수하고 완전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사랑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 된다.”



사랑 안에서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시인들은 항상 사랑에 대한 찬미노래를 부른다.

사랑이 우리를 더 생기있게 해주고 다른 이의 선에 너무나 몰두하여 모든 분리감을 잃어버리게 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도록” 해준다고

묘사하며 사랑의 힘을 알려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지루하고 회색 빛으로 보이던 것이 색깔을 입는다.

삶은 목적과 약속으로 가득 찬다. 닫혀있던 것이 갑자기 열린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슬픔을 나누는 사람, 우리마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선물에 알맞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사랑에 관하여 우리는 성인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성인들이란 보통사람들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영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갖고 있을 때에는 별로 배울 것이 없다.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그의 짧은 생애의 사명이

단지 “사랑이 사랑 받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추상적이지만 야심있는 말이다.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사랑과 공감할 수 있는 동반적 대상 사이에서 (개나 고양이),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만질 수 있는 것을 택한다.

그렇다면 성인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의미는 단순히 천상적인 어떤 것,

 “실제적인 것”의 냉혹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가?

 

성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다른 이들,

다른 장소나 다른 것들의 사랑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들은 사랑이 열쇠라고 믿는다. 그러나 각각의 문이 열릴 때마다,

거기에는 더 넓은 것으로 이끄는 또 다른 문이 있다.

 

성인들은 그림자와 도피의 세계에 정착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더 커져가고, 더 깊어져 가는 인간성의 원천에 도달하는 여정을 중단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승 속의 모든 사랑, 모든 아름다움, 모든 행복이 “실제인 어떤 것”의 모형이며, 예조라고 믿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거스틴 성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물질적 아름다움이나, 현세적 질서의 아름다움은 아니다.

우리 눈을 너무나 즐겁게 해주는 지상의 번쩍이는 빛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분을 사랑할 때, 나는 어떤 빛, 어떤 소리, 어떤 향기, 어떤 음식,

어떤 포옹을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내면의 자아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나의 영혼이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빛 속에서 씻길 때,

결코 죽어 사라지지 않는 소리에 나의 영혼이 귀를 기울일 때,

바람에 날아가 버리지 않는 향기로 숨을 쉴 때,

절대로 먹어서 없어지지 않는 음식을 맛볼 때,

욕망의 성취에 의해 단절되지 않는 포옹에 영혼이 매달려 있을 때,

나는 내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셈이다.

이것이 나의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다.


사랑하기 위하여 성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직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자연적인 행복


도로시 데이는 그의 회상록인 「긴 외로움」에서 포스터라는 남자에 대한 사랑이야기와

그의 영적인 여정을 서두르도록 포스터가 했던 역할을 표현하고 있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 법적으로 결혼관계에 있었던

그 남자는 무정부주의자이고, 영국계통이었으며, 생물학자였다.”

그들은 1920년대 초기에 만났고, 곧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데이는 그들의 관계가 “법적인 결혼”이었다고 생각했다.

포스터는 “가족이라는 기관”에 대한 경멸을 결코 숨기지 않았으며,

그들의 관계가 단순히 “동지관계”라고 여겼다.

그러나 데이는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이러한 “자연적 행복”을 누리던 시기에 데이는 더 큰 행복을 상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포스터는 자연을 맹렬하게 사랑했고, 그래서 종교를 무시했으나,

데이는 이 자연적 행복으로부터 전혀 반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에게로 가고 있었다.

그는 산보하는 중에 기도하기 시작했고, 미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느님이 안 계실 수 있는가?”

그는 포스터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거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결국 둘은 데이가 아이를 낳고 세례를 받게 하면서 갈라서고 말았다.

 

아마도 어거스틴의 경우처럼 도로시 데이의 “순전히” 인간적 사랑과

“더 고귀한” 종교적 염원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남자와 여자간의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대립된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고 썼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내가 아이를 갖게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느님을 닮게 만들어 졌으며, 그분과 함께 공동창조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데이는 “온전한 사랑, 육체적이며 영적인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데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었다.

“자연적 행복”을 경험하면서 그는 더 큰 행복에 대한 갈증이 더 커졌다.

포스터에 대한 사랑, 딸에 대한 사랑, 지구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가난한 이들과 낙오된 이들에 대한 사랑이 모두 더 큰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

이 모든 것은 피터 모린과 만난 수년 후에 가톨릭 일꾼공동체로 통합되었다.

 

어거스틴 성인은 삶을 “사랑에 이르는 길”이라고, 무엇이 우리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으며,

어떻게 적절히 사랑하는가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사랑 속에,

안락과 소유, 혹은 명성 따위에 의해 한정된 감옥 속에 살아가고 있다.

또 다른 이들은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을 선택하여 벽을 쌓기까지 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가족, 그들의 나라, 혹은 그들의 교회 주위에 울타리를 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문제는 우리를 더 깊이 초대하는 소리에 우리가 열려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랑이 지평선으로 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실존을 제한하지 않을 때,

모든 것들은 그들의 숨겨진 깊이를 드러내고, 우리를 더 앞으로 이끈다. 단지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것들까지도 무한한 것을 보여주는 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이웃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두 가지 측면으로 대답한다.

첫 번째 측면은 하느님을 “온 마음과 온 정신, 그리고 힘과 영혼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첫째 측면은 즉시 이어 두 번째 계명과 연결된다.

 “첫 번째 계명에 못지 않은” 이것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명의 구체적인 예를 예수님은 사마리아사람의 이야기로 표현한다.

사마리아인들은 정통파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한 사마리아사람이 길을 가다가 상처입고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나그네를 발견했을 때,

가던 여정을 멈추고 돌보아준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예를 우리는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이를 가지고 낳아 키우는 부모들을 보면서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지 볼 수 있다.

또한 열정적이며 보호적인 사랑으로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한 부모이외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몰로카이의 다미안 성인, 오스카 쉰들러 등 수많은 사례가 있다.

특히 오스카 쉰들러의 경우는 그가 보통기준에서

“성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면서도 그런 사랑을 실천한 예다.

 

아마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기준은 우리가 결코 그 수위에 완전하게

도달할 수가 없으며 다만 노력해야 하는 하나의 지평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온 마음과 몸과 정신과 영혼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준이

너무 높게 설정되었다 해도 예수님이 더 간단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 너희는 나를 받아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주었다”는 기준이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주님에게 이런 일을 했단 말인가?

여기에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에 숨겨진 의미를 드러낸다.

즉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했다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마태오 25,31-46).

 

성인들은 이 신비스러운 대칭에 내포된 의미에 따라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웃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다.

길가의 벌거벗고 피 흘리는 사람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병든 사람들,

우리가 빵을 나누는 굶주린 이들, 우리가 짐을 가볍게 해줘야 하는

외로운 이들 속에 예수님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보면, 이러한 등식은 참으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게 보인다.

한편으론 넝마를 걸친 걸인이고, 또 다른 한편으론 하느님의 아들이라니.

그런데 양편을 공평하게 균형 잡아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이 부족하고, 한편으로 원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거지들이다.

마더 데레사가 썼던 것처럼, “하느님은 굶주린 이들, 병든 이들, 헐벗은 이들, 집 없는 이들과

그분 자신을 동일시했다. 굶주림은 단지 빵 뿐만 아니라 사랑, 보살핌에 대한 굶주림으로,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헐벗음은 단지 입을 것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누는 연민에 대한 헐벗음이다.

집 없음은 단지 돌로 만든 있을 곳에 대한 것만 아니라,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여정을 가든, 이웃들을 사랑하는 여정을 가든

궁극적으로 똑 같은 종말에 이르게 된다. 갚음을 바라거나, 계산하지 않고 줄 때마다

우리는 사랑의 빛을 반사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사랑과 행복


그러나 그런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대답은 우리 각자가 알고 있는 사랑과 행복의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대상을 붙잡고 계속 움켜쥐려는 소유적인 본능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랑에서 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사랑하는 대상을 잃게 될 경우 불행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떤 다른 사람의 마음도 참으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랑에 근거하는 행복은 너무나 부서지기 쉽다.

 

그러나 성인들은 이런 사랑을 한 것이 아니다.

복음이 지닌 역설들 중에 하나는 우리가 버릴 때에 참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갚음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하는 사랑은 시장법칙에 불과하거나,

시몬 베이유가 말한 것처럼 중력의 법칙일 뿐이다.

참다운 사랑은 중력의 법칙을 거부한다.

참다운 사랑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행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자신만을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

나눔에 의하여 소멸되는 행복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만큼 풍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만족에서 오는 행복은 가짜이며, 일시적이고, 항상 슬픔으로 끝난다.

그런 가짜 행복은 우리의 정신을 편협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참다운 행복은 이타적인 사랑에서 발견된다. 이타적 사랑은 나눌수록 증가되는 사랑이다.”

 

사랑의 숨결이 없는 삶은 비참한 삶이다.

충분한 물이 없는 식물은 한동안 메마르게 살 수 있겠지만, 꽃을 피울 수는 없다.

우리의 삶도 사랑이 호흡하지 않는다면 이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동시에 우리 각자의 중심에는 숨겨진 신원이 있다.

그것은 우리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잠들어 있으며,

마침내 입맞추어 깨어나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입맞춤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띈다.

프란치스꼬의 경우 그것은 나병환자의 입맞춤이었다.

안토니오 성인에게는 성서구절로서, 그를 새로 태어나게 만들었다.

사랑이 우리의 삶에 어떤 형태로 들어오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를 보다 나은 자아가 되도록 초대한다.

더 용감해지고, 더 친절하며, 더 용서하고,

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더 변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게 만든다.

많은 성인들은 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을 받았던 자캐오와 같은 경험을 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게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

이 사랑 안에서 그들은 새롭게 시작하고 불가능한 것들을 하며,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용기를 발견했다.

요한 복음사가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사랑합니다”(Ⅰ요한 4,19)라고 썼듯이.

 

“지옥은 더 이상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죠르쥬 베르나노스는

그의 작품 어떤 시골신부의 일기」에서 말한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에 내려간 인간도 비록 그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하는 힘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베르나노스는 쓰고 있다.

이 사랑의 능력은 비록 상실되고, 잊혀질지라도 모든 인간존재의 고유한 핵심, 즉 영혼을 형성한다.

“구원”의 의미에는 항상 이 보이지 않는 능력이 재발견되고 배양된다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소중한 것을 잃었으나, 이제 다시 발견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날 때, 또 다른 라자로가 다시 일어난다.



행동하는 사람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들은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랑의 감정, 갈망, 불타는 열정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란 “지상의 두 사람이 깊게 사랑해서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것과 같다. 눈길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 같은 관계”라고 했다.

성인들은 감정에 대하여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말과 감정 그 이상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배우자, 이웃, 적 등 누구를 사랑하든지 간에 사랑은 행동으로 표현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브스키는 죠시마 신부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사랑을 하는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한다.

이웃을 적극적으로 끈질기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그러면 그런 사랑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와

우리 영혼의 불멸을 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웃을 완전히 이타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어떤 회의도 우리영혼 속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적극적인 사랑? 우리는 사랑에 대해 꿈꾸는 것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실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하기를 배운다.

초기 사막교부들 중의 한 사람인 은수자 테오판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에게 겸손이나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없는 한 모든 영적인 것은 없다...

겸손은 겸손한 행위로써 얻어지고, 사랑은 사랑의 행위로써 얻어진다.”

매일 반복되는 사랑의 행위는 사랑의 습관을 만들어준다.

의식적인 노력으로 시작되는 것은 실습을 통하여 삶의 어떤 일정한 행동이 되어간다.

우리의 모습이 자비에 의해 빚어진 것처럼,

그것은 모든 상황과 모든 만남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형성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그 때에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충고를 마음에 새겨보자: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어 보라. 그러면 그 곳에서 사랑을 얻을 것이다.”



사랑의 기술


그래도 우리에게 사랑으로 되갚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럽지 않고”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은총의 역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은총은 큐피드의 화살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선택과 훈련이 역할을 해야한다.

에릭 프롬이 말한 것처럼,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인(1873~1897)은 불란서 노르만디 지방의 한 가르멜 수도원에서

짧은 생애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매우 탁월한 숙련공이었다.

어렸을 때에 이미 데레사는 성인이 되려고 결심했고, 그것을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도 고안했다.

그는 그 방법을 “영적인 아이의 길”, 혹은 “작은 길”이라고 말했다.

 

이 길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의 태도에 기반을 둔 길로서, 일상생활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

만남들, 작은 모욕 등에 사랑으로 응답하려는 노력을 의미했다.

데레사는 이 길을 실천함으로써 삶의 일상사를 사랑의 용광로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삶의 상황이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한 마당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행동과 의도의 아주 작은 영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레사는 자신을 하느님의 정원에 핀 “작은 꽃”이며, “아기 예수의 장난감”이라고 칭하길 좋아했다.

그는 강철같은 의지의 소유자였고, 성인이 되는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대충하여 달성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

죽은 후 발간된 자서전, 「영혼의 일기」에서 데레사는 모든 성소에 대한 부르심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전사, 사제, 교회의 박사, 순교자 등등.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는 자신의 성소가 “사랑 그 자체”라고 믿었다.

이 사랑의 덕은 모든 성소를 하나도 빠짐없이 포용하는 덕이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하고 그는 썼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그에게 대가를 지불하게도 했지만,

한편으론 기쁨을 주었다. 거룩함에 이르는 “작은 길”은 데레사에게 공동생활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상적인

콕콕 찌르는 아픔들까지 받아들이는 길이 되었다. 동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려는 충동을 절제해야 하는

모든 일상의 기회들은 데레사의 인내와 용서를 더욱 확장시켜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녀원 안에 적은 없다. 그러나 자연히 어떤 수녀는 좋아하게 되고, 또 다른 수녀는 마주칠 기회를 피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피하고 싶은 수녀를 사랑해야 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성서말씀을 인용한다, “너희들이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죄인들도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

 

데레사는 공동체생활의 일상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악성폐결핵으로 마지막 수개월 동안

몸과 정신이 큰 고통 속에서 단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법을 끝까지 고수했고,

그러한 충실함 속에서 마지막 승리를 증언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느 날 수녀 하나가 데레사에게 영원한 행복에 대한 책을 읽어 주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영원한 행복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나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 다시 돌아와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임박하면서 그는 말했다,

“나의 사명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영혼들이 좋으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나의 작은 길을 영혼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의 이런 갈망이 채워진다면,

 세상종말까지 이 지상에서 나의 천국을 지낼 것입니다. 그래요,

나는 나의 천국을 지상에 선한 일을 하면서 보낼 것입니다.

 

데레사는 겨우 24세였다. 그렇지만 그의 메시지는 세계에 엄청난 호응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성된 후,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성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작은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와 닿았다. 위대한 일을 하도록 불리운 사람은 소수이다.

그러나 데레사가 표현하듯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해야 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응답과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증언했던 “위대한” 응답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의 원칙이 있다.

데레사에 의하면 사랑의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영웅이 되는 순간이며,

행복과 거룩함으로 가는 길에서 한 걸음씩 더 내딛는 행동이다.



사랑하기를 선택하기


데레사가 죽던 해, 1897년에 태어난 도로시 데이는 “소화”와 별로 닮은 점이 없다.

실제로 도로시 데이는 데레사를 처음 알았을 때 호의를 가지지 않았다.

1928년 고백신부에게서 데레사의 자서전을 받았을때,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열여덟 살에 엄격한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면서 약을 먹거나 식사를 할 때,

추위와 더위를 견디고, 수녀원 안의 악의 있는 동료들을 참아내는 일이 영웅적인 애덕을 실천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느꼈다니, 도대체 이 성인은 어떤 성인이었는가?”

개혁자 아빌라의 대 데레사나 쟌다크 같은 성녀에게 도로시 데이는 더 이끌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데이는 소화 데레사를 좋아하는 성인으로 삼았고, 그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하고,

“작은 길”의 영성에 대해 표현하기도 했다.

데이는 소화 데레사의 가르침에서 사회적 의미를 파악한 몇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작은 것들의 중요성을 우리는 무시한다. 작은 것들을 위한 항의와 입장을 선택하지 않는다.

러나 우리 모두는 성인이 되도록 불리었고,

거룩함이란 사랑의 실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데이는 주장한다.

 

데레사의 “사랑의 기술”이 지닌 실천적인 지혜는 도로시 데이에게 있어서

“무시되고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생활로 광범위하게 확인되었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아직도 어떤 규칙이나 심사규정을 갖고 있지 않다.

모두가 환영되고 받아들여진다.

결과는 도스토예브스키의 소설에서 보이는 것처럼, 온갖 사람들의 집합체로 나타난다.

순례자들, 학자들, 그리고 “거룩한 바보들”, 젊은이들과 나이든 사람들, 노동자들, 부랑자들,

미친 사람들, 하층사람들, 쓸모 없는 사람들이 모인다. 사랑만이 그런 집구석을 유지시킬 수 있다.

 

또한 데이는 이런 집에서 나타나는 긴장과 갈등, 어려움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짐은 너무 무겁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내 사랑은 너무나 작다.

어떤 폭력까지 느낀다. 내 마음 속엔 사랑이 없고, 아무것도 그들에게 줄 것이 없다.

그래도 마치 사랑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은 그런 가장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길 원한다면, 곧 당신은 사랑하게 된다. 이 미치광이 노인을 사랑하길 원한다면,

언젠가 당신은 그렇게 사랑하게 된다.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도로시 데이가 분명히 사랑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매우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의 무정부적인 기능은 전형적인 수도원의 체제와 너무나 다르게 보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비슷하다. 즉 일꾼운동에 모여든 사람들 하나 하나가 “애덕의 학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공동체로 산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협력과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소화 데레사의 생각을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한 식탁에 앉아 소리내어 먹으면서

신경을 거슬리는 사람을 참는 것보다 추상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이처럼 일상의 작은 일을 하며 치러야 할 단련이 우리의 사랑하는 능력을 정제시켜 준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용서를 배우게 되고,

우리의 인내가 불가피하게 시험될 때에 인내를 배우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은 수도공동체를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길을 배우는 학교”라고 불렀다.

이것은 수도원이 소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머튼에 의하면,

수도공동체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하느님의 행복을 나누는데” 있다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바보들을 쫓아버리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이라고 믿기 쉽다.

 

이런 관점은 가족에 관해서도 사실이다.

가족은 우리가 선택해서 만드는 공동체가 아니다.

때때로 가족은 자연적인 사랑과 지지의 장소이다.

또 다른 때에 가족은 숨막히게 만드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 역시 애덕의 학교이다. 우리가 가장 친밀하게 알고 있고,

또 우리를 그렇게 알고 있는 가족 안에서도 우리는 단순히 서로 참아낼 뿐만 아니라,

더 용서하고 더 인내하는, 더 나은 우리자신이 되라는 도전을 받는다.

그런 도전을 찾아 다른 자리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

도전들은 매일, 매순간이 아니라도 우리를 찾아내고 있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일꾼가족 안에서 보여지는 실패와 불화에 끊임없이 울었다.

그리고 천국을 일별하는 것 같은 짧은 순간의 친절함과 동료애로부터 위로를 받았을 뿐이다.

긴 외로움」에서 데이는 모든 소명의 핵심에 있는 근본적인 고독에 대하여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책을 이렇게 끝내고 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빵을 쪼개면서 그분을 알고, 빵을 쪼개면서 서로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긴 외로움을 알고 있고,

유일한 해결책이 사랑이며, 그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온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새로운 눈


사랑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허락한다. 표면 밑에 있는 더 깊은 진실과 가치를 보도록 해준다.

분명한 가치나 품격이 보이지 않고 초라하며 낡아빠진 어떤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일 때, 혹은 우리가 특별히 행복할 때,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부여된다. 우리 아버지의 낡은 스웨터, 어머니의 오래된 찻잔 등을 보면,

그 낡은 겉모습 아래 숨겨진 진실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은 고유한 비밀의 삶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이 공통점이 없는 것들을 한데 모으고, 그것들이 은총의 도구가 되도록 만든다.

성인들에게 온 자연질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무한한 소중함과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 사랑에 참여하는 만큼,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초월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모든 것들은 제각기 우리를 우리의 진정한 집으로 초대한다.

 

성인들은 보이지 않는 실제에 조율을 맞춘 사람들이었다.

즉 우리 모두가 사랑의 그물망 속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

그래서 온 우주가 한 실제에 뿌리를 두고 있고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깨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만일 우리에게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서로 갈라져있다는 꿈에서 즉시 일어나 경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실제를 성인들은 보았다.

 

이런 “사랑의 빛들”에 깨어있었던 한 젊은 가톨릭사제 잉겔마르 운자이티그는

바바리아 지방의 나치 수용소 한 가운데에서 그의 사명의 의미를 이해했다.

다카오의 이십만 수용인들 중에는 2500명이 넘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이 있었고,

운자이티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나치 점령자들은 성직자들을 따로 분리시켜 수용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미가를 만들고, 비밀미사를 하거나, 동료 수용인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다카오는 “세상에서 가장 큰 수도원” 이었다.

 

유대인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서품된지 얼마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된 운자이티그 신부는 다카오에서 첫 번째 소임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수용소를 거룩함을 배우는 학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나에게 몰래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때때로 불운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매우 큰 행운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의 학교에서 오로지 경험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는 지요.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세상에 얼마나 평화가 부족한지 느끼고 경험해야하며,

또한 그들이 참다운 평화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매우 소중하고 아끼는 것을

가져가신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1944년 12월 수용소에 장티푸스가 발병했다. 첫 번째 달에 2천명 이상의 수용인들이 죽었다.

전염된 사람들은 지저분한 막사에 격리되었고,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다카오의 지옥 안에서도 이 격리된 곳은 내적인 지성소가 되었다.

병자들을 위한 잡역부 소집에 운자이티크 신부는 20명의 자원 사제들과 함께 응답했다.

장티푸스의 심각한 전염 사태를 볼 때, 자원의 의미는 모두에게 확실했다.

이 자원자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제들은 이 없음 속으로 자신들의 사랑과 믿음을 가져갔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존엄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병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깨끗하게 하는 일은 끝이 없는 일이었다.

사제들은 또한 고백을 들었고, 마지막 성사를 주며,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나치들이 병동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그곳은 인간애가 표현되는 특별한 자리가 되었다.

 

수주일 후, 잉겔마르 신부는 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1945년 3월 2일, 서른 네 살 생일 다음날, 그리고 미군이 수용소를 해방시키기 수주 전에 죽었다.

죽기 바로 전에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은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승리는 하느님 편에 있어야 합니다.

비록 때때로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에게 쓸모없는 일로 여겨진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사랑에 깨어 있음을 ,

그리고 그 사랑이 피조물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께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오래 지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랑과 평화가 곧 다시 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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