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를 찾아서

108 백팔번째 순례지 제주 제주 황사평성지

하늘나그네 2016. 4. 2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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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량 순교현양비에 이어서 제주도 제주시 화북2동 5662-1 황사평성지를 찾아보았다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을 계기로 100여 년에 걸친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책은 끝이 났지만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박해 사건들이 빈발했다. 더욱이 어떤 사건은 공식 박해를 능가할 정도의 대규모로 진행되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우를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신축교안이 일어난 1901년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지 15년이 지난 때였고, 가톨릭 선교사가 제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한지 채 2년이 못 된 때였다. 1899년 5월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이듬해 초 페네 신부가 본토로 전출되고 그 후임으로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했다. 김원영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해 새 본당을 설립하고 전교에 매진했다. 그 결과 교안 발발 직전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교우 241명, 예비신자 620명으로 늘어났다. 신축교안이 벌어진 직후인 1901년 5월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추가로 파견되었다.
 
이 무렵 제주에는 봉세관(封稅官)이라는 제도에 대한 도민들의 원성이 높아 가고 있었다. 봉세관이란 1900년에 신설된 세제로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 민초들로부터 세금을 더욱 악랄하게 거두어들이기 위한 제도였다.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은 해당 지방의 백성들로부터 온갖 잡세를 거두어들여 지방 토착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지방의 토착 관료들과 제주에 진출해서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업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던 이 문제를 둘러싸고 봉세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당시 민중들의 불만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돌림으로써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제주 신축교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렇듯 신축교안은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되어 중앙 정부의 가혹한 조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해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

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고,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가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게 되었다.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한 뮈텔(Mutel)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 과정에서 피살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가 1903년 11월 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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