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를 찾아서

82 팔십이번째 순례지 경기도 안성 죽산성지

하늘나그네 2015. 10. 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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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지순례를 마치고 안성에서 일박을 하고 2015년 10월4일 영중 27주일 아침 일찍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림리 703-6 죽산순교성지를  찾았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갈라지는 주요 길목인 죽산에는 그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 시대부터 일찍이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인근의 교우들이 붙잡혀 오면 지금은 죽산면 사무소가 되어 버린 이곳에서 참담한 고문 끝에 처형되곤 했다.
 
여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해도 25명에 이른다. 하지만 척화비를 세우고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사학 죄인'을 색출, 무차별적으로 교우들을 끌어다가 처형하던 당시의 몸서리쳐지는 박해의 서슬을 생각해 볼 때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셀 수조차 없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부터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죽산의 순교 사화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들뿐이다.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김 도미니코의 가족이 교우인 사실을 안 마을사람 십여 명이 작당을 하고 찾아와 열일곱 된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들을 불러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기어이 딸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60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자리에서 순교했다. 또 여정문은 그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국법으로는 아무리 중죄인일지라도 부자를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죽산에서는 부자와 부부를 함께 처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이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순교한 처형 장소가 '잊은 터'이다. 지금은 굴착기로 깎아 냈고 목장의 한 귀퉁이로 변해 버렸지만 목장이 되기 전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夷陳) 터'이다.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이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려 왔던 것이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 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지도 한 번 끌려가면 영영 볼 수 없는 곳, 그 참담한 비극이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죽산에는 또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지금은 삼죽면 소재지로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고 한다. 그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이 있다. 지형이 조금 도드라져 이렇게 불렸다고도 하고 땅이 진흙이어서 신을 땅에 두드려 패지 않으면 신 바닥에 붙은 진흙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성역이라는 한자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어떤 친절한 자매님이 찍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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