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의 발자취

제1편 마산교구 전사前史 ②

하늘나그네 2014. 2. 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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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마산교구 전사前史 ②


제1장 경남 서부지역과 천주교 전래

4. 함양지역과 천주교


1) 함양지역 첫 교우촌의 형성

함양지역에 교우들이 나타난 것은 정해丁亥박해(1827년)이후라 했다.

전남 곡성의 한 옹기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박해의 계기가 되어 전라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피난 교우들이 경상도로 넘어온 것도 관원의 끈질긴 추적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운산 일대에 숨어 있다가 함양지역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1881년부터 전라도 지역을 담당했던 리우빌 신부의 1883년 교세 통계표에는 함양지역 첫 공소로

대운암과 터골 공소가 등장한다. 두 공소는 서하면 운곡리(백운산 골짜기라는뜻)에 있었는데,

이곳에는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을 경계 짓고 있는 백운산(해발 1,279m)이 위치하고 있다.

피난 교우들에게는 숨어지내기에 알맞은 곳이었던 것이다.


2) 신자 수 증가와 공소의 설립
1883년 이후부터는 함양면과 안의면에도 신자들이 등장한다.

로베르 신부의 1887년 보고서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1887년이면 천주교가 이미 허용되어 있던 시기이므로 박해 때 교회를 떠났던 신자들이 돌아오기도

했고, 새 교우들의 입교도 많았다.

1900년 전북 진안에 어은동본당이 설립되자 함양지역은 이곳 소속이 된다.

어은동본당의 김양홍 신부는 판공 때면 함양을 방문하여 공소를 돌보며 새로운 공소도 세웠다.

그의 보고서에 등장했던 공소는 백전면의 능경. 섭자리공소, 서하면의 옥고리실공소, 안의면의 음전공소,

병곡면의 마평공소, 수동면의 용수막공소, 그리고 함양본당의 전신이 되는 대맛공소이다.

김양홍 신부는 상림 숲 위쪽의 죽장 마을에 교우들이 생겨나자 그곳에 살고 있던 최학조(안드레아)의 집을

공소로 인정하고 그에게 회장직분을 맡겼다(1909년). 이곳이 대맛공소의 출발이었다.

이후 최학조와 신자들은 인근 원교마을에 있던 보통학교 부지를 매입하여

함양성당을 지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3) 함양본당의 설립
함양공소의 본당승격 발표는 1913년 5월 10일 대구교구 사제 피정 후에 있었다.

초대 주임은 이상화 신부였고 회장은 최학조가 맡았다.

처음에는 학교 건물을 개조해 임시성당으로 사용했으나 1938년 박재수 신부 때 성당을 신축하여 드망드

주교로부터 축성을 받았다. 그러나 1970년 김석좌 신부는 원교성당이 지리적 여건으로 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함양읍 중심에 위치한 교산리(현 위치)에 대지를 마련하고 새성전을 지어 이주하였다.


 

1938년 원교에 세워진 함양성당

 

 

4) 함양본당의 역사적 의미
함양본당은 대구교구 신설 후 첫 번째 본당으로 설립된 곳이다.

대구교구는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에서 분리되어 경상도와 전라도를 담당했다.

분리 당시 본당은 18개였고 공소는 무려 390개였다. 공소에선 저마다 본당의 꿈을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함양본당이 탄생한 것이다.
본당 신설을 꿈꾸던 공소 교우들에게 희망과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함양은 영남과 호남을 잇는 산악지대에 있었기에 더욱 뜻이 깊었다.
출처 천주교 마산교구 40년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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