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세기의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유다 마카베오’는 형제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군인이다.
이들의 쿠데타는 기원전 164년에 성공한다
.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성경이 ‘마카베오기’ 상하권이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그때의 승리를 축제로 이어오고 있다.
매년 12월에 열리는 ‘하누카’축제다(요한 10,22).
마카베오 시대의 지중해 연안은 로마와 그리스가 대치하고 있었다.
로마가 우위에 있었지만 동방은 그리스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말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왕국은 신하들이 다스렸는데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맡았고 오리엔트는 셀레우코스 장군이 차지했던 것이다.
마카베오의 반란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때의 일이다.
성경에서 악명 높은 박해자로 등장하는 ‘에피파네스’다.
그는 터키와 페르시아, 그리고 팔레스티나에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여 부강한 왕국을 만들려 했다.
당연히 그리스 문화를 강요했고 자국의 종교전통은 없애려했다.
이스라엘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상숭배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안티오코스 4세는 대사제를 포섭했다.
당시 대사제는 예루살렘의 재정과 운영을 책임졌고 최고의회(산헤드린) 의장을 겸임했다.
대외적으로 민족을 대표했던 것이다.
그는 ‘계약 궤’를 모신 ‘지성소’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일 년에 한번 ‘속죄의 날’에 기도하러 들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12지파의 구심점으로 받들게 했다.
원칙적으로 모세의 형인 ‘아론’의 혈통을 지녀야만 대사제가 될 수 있었다.
대사제 ‘오니아스 3세’는 에피파네스의 포섭을 완곡히 거절하며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파면되었고 그의 동생 ‘야손’이 대제사로 임명되었다(2마카 4,8).
대사제가 이방인의 임명으로 경질된 것이다.
더구나 야손은 에피파네스에게 뇌물을 바치며
로비를 벌였기에 왕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이래저래 유다인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후 에피파네스는 유다교 말살정책을 펼친다.
군인들을 동원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에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안식일 준수와 제사봉헌을 금지시켰고 할례도 받지 못하게 했다.
율법서(토라)는 불태웠고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다.
어기면 사형이었다.
마침내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다인들로 하여금강제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기원전 167년 12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들의 감정은 자극되었고 결국은 폭동으로 이어졌다.
주역은 마카베오의 아버지 ‘마타티아스’였다.
이렇게 해서 유대독립운동은 시작되었다.
신은근 신부(바오로, 호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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