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를 찾아서

101 백일번째 순례지 서울 중구 광희문성지

하늘나그네 2016. 3. 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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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9일 화요일 서울교구  순례 삼일차이다

오늘은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228-16 광희문 성지를 찾아보았다

이성지는  밑에 사진처럼 길가에 성곽에  높은 문이 하나 있을뿐 그옛날의 순교흔적은  보이지않는다


2백 년이 겨우 넘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 반을 차지하는 1백여 년은 그야말로 피로 점철된 박해의 고난기였다. 전국 방방곡곡 순교자들의 피가 튀지 않은 돌이 없었고 포졸들의 눈길을 피해 방황하던 천주교인들의 발길이 가 닿지 않은 산과 골짜기가 없었다.
 
목자도 없이 스스로 복음을 찾아 나섰고 천주의 말씀을 자진해서 수용했던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하느님께서 주신 고난의 십자가가 지닌 의미를 우리 후손들에게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특히 천진암, 주어사에서 시작돼 한양 땅에서 꽃피운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남터에서, 절두산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천주교인들은 그저 천주를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목을 잘리고 매를 맞아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 처형지에는 그 때의 처참했던 순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서울시 중구 광희동 2가에 묵묵히 서 있는 광희문(光熙門)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이다. 서울 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1711년에 개축하였다. 성문 위 문루는 1710년에 이르러 완성되었고, 광희문이라는 편액도 이때 써 붙였다. 그 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어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광희문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 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혹은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이 문을 통해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성녀 우술임 수산나 · 김임이 데레사 · 이간난 아가타 · 정철염 가타리나, 그리고 복자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송 베드로와 며느리인 복녀 이 안나의 시신이 광희문 밖으로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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