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일생은 파란만장하였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노년의 다윗은 자신의 삶을 회한으로 돌아보며‘
아들 치세’에는 평화가 넘치기 를 기원하였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지었다.(1역대 22,9)
이렇듯 솔로몬은‘평화’와연관된이름이다.
그는 통일 이스라엘의 세 번째 임금으로 화려하게 등극한다.
신도시 예루살렘 출생에다
다윗과 밧 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기에 모든 면에서 새로웠다.
더구나 그는 21세의 젊은이였다.
하지만 솔로몬을 지지하는 신진세력들은 불안했다.
솔로몬의 이복형인‘아도니야’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수진영의 후원을 업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아도니야는 밧 세바에게 청을 넣는다.
말년의 다윗을 도왔던 수넴 여자‘아비삭’을 아내로 달라는 청원이었다.
오갈 데 없는 아비삭을 거두어 살겠다는 뜻일수 있었다.
하지만 솔로몬의 지지자들은 달리 해석하였다.
다윗의 후궁을 요구하는 것은 다윗의 왕권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본것이다.
그들은 솔로몬을 설득하여 아도니야의 목을 치게 했다.
그리고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제사장‘에브야타르’를 파면하고
그자리에‘차독’사제의 임명을 건의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당시 제사장은 제관 계급의 수반으로 성전에 관한 모든 권한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사장은 세습제였다.
‘에브야타르’는 사무엘 시대의 제사장‘엘리’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권한이 ‘차독’ 가문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차독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성별했던 사제였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자 아도니야 편에 가담했던 군 사령관‘요압장군’은
성전의‘제단 뿔’을 붙잡고 선처를 호소했지만 그 역시 살해되고 만다.
남아있던 사울세력의 구심점인‘시므이’에게는 가택연금이 내려지고
주거는 예루살렘으로 국한되었다.
하지만 그마저 3년 뒤에는 처형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을 위협하던 정적들은 모두제거되었고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으로 40년을 통치 했다. (B.C. 961-922).
솔로몬 치세의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안정을 누리던 시기였다.
이집트는 자국의 정치적 혼란으로 세력이 약해 있었고
북쪽의 아시리아 역시 제국으로서의 세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틈새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의 약소국가들을 모두 정복했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은 전성기를 인식하고 숙원사업이었던‘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한다.
즉위 4년 2월에 착수하여 11년 8월에 완공하는 대역사였다.
봉헌식 때 그는 제물로 황소 2만 2천 마리와 양 12만 마리를 바쳤다.(1열왕 9,63)
풍요와 자신감이 넘쳤던 솔로몬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신은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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