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것을
초상이 났다. 그것도 갑작스런 죽음이다.
의료시술을 해 볼 겨를도 없이 중환자실에서 몇몇 가족과
의료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허망스레 떠나셨다.
부고를 접한 나머지 가족과 친인척들이 황급히 달려온다.
충격과 비통에 잠긴 채 모두 침묵일 뿐이다.
분주히 장의 절차들이 속속 진행된다.
조문객들이 여기저기서 줄을 잇는다.
망인을 위한 기도가 빈소를 가득 채운다.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경건하고 엄숙하게 영결미사가 봉헌된다.
장례행렬이 쓸쓸히 도로를 누빈다.
장지에 이르자 이윽고 땅 속으로 하관예절,
산 이들의 마지막 인사로 국화 꽃송이들이 관 위에 그득히 덮인다
.
이내 인부들이 손 빠르게 무덤에 흙을 야물게 채우고 묘를 꾸민다.
모든 조객들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망인을 외로이 남겨둔 채
후미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도시락 먹기에 여념이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러고 보면 죽음은 아주 평범하고 예사로운 일 같다.
죽음을 맞은 망인에겐 절대적 사건인데.
세월의 장구함과 우주의 광활함에 비해 우리 일생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극히 미미한 한 점에 불과 하다.
비록 값지고 절실한 한 생이지만 말이다.
그토록 짧고 미미한 일생일진대 우리는 더 크고 중요한,
시공을 뛰어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하게 믿는 한,
우리는 죽음을 통해 시간의 차원이 아닌 영원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확신한다.
그 세계는 현세의 우리 인식능력으로 파악되거나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국은 그동안 우리가 주워들은 그런 형태의 세계는 결코 아니다.
말 그대로 신비일 뿐이다.
다만 현세라는 그림자를 보고 실체로서의 내세가 있음을 확신할 뿐이다.
실체는 그 가치가 그림자와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내세로 이끄는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다.
영원한 기쁨의 시작이기에.
모든 두려움은 사랑의 결핍이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 4,18)
결국 사랑의 삶만이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이다.
이형수 몬시뇰 (블라시오, 총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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