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자

온세계가 찬탄한 이순이 누갈다의 사랑과 믿음 순결

하늘나그네 2010. 1. 1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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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동정순교자' 이순이
세계교회가 찬탄한 한국천주교 첫 '童貞女'

동정순교자(童貞殉敎者) 이순이(李順伊)의 본관은 전주(全州)다. 아명은 유희, 세례명은 '루갈다'이다.

 

그녀는 1782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윤하(李潤夏)와 어머니 안동 권씨(權氏)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루갈다의 아버지는 이수광의 8대손이며, 그녀의 외할머니는 성호 이익의 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권철신과 권일신의 누이동생이었다.

루갈다는 1784년 아버지가 세례받을 때 함께 세례성사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12살 되던 179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루갈다는 비록 신체는 병약했지만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녀가 14살 되던 1795년 주문모(周文謀) 신부를 만날을 때 나흘 동안을 두문불출, 첫 영성체(領聖體)를 받기 위한 준비에 전념하였다. 이에 따라 루갈다는 교리시험을 무난히 통과하여 성체성사를 받았다.

 

얼마 후 루갈다는 일생을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동정(童貞)을 지키며 살기로 결심했다. 당시 여성신도들 사이에 동정생활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동정생활을 높이 평가한 까닭은 혼자 사는 사람은 오매불망 천주의 일에만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루갈다의 결심을 승인한 주문모 신부가 1795년 4월 초 유항검(柳恒儉)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역시 평생을 동정으로 생활하기로 결심한 그의 맏아들 중철(重哲·일명 종선·세례명은 요한·1779∼1801)과 만났다.

 

그리하여 주 신부는 루갈다와 요한에게 결혼식을 올리되 서로 남매처럼 살면서 동정생활을 하도록 권면했다. 1797년 10월에 결혼식을 올린 후 루갈다는 1년 동안 친정에 있다가 이듬해 9월 전주 초남리에 있는 시댁으로 갔다.

 

첫날 밤을 맞은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꿈꾸어 오던 생활이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면서 이 은혜를 굳은 신심과 철저한 실천으로 보답하자고 맹세하였다. 결혼 후에도 루갈다는 천주교의 덕행을 닦는데 전력하였다.

 

이후 루갈다는 요한과 더불어 격려하며 끊임없는 인내로 순교하기까지 4년 동안 한 방안에서 잠을 자면서도 오라비와 누이로 부르며 지냈다.

 

하지만 그들도 하마터면 동정서원을 깨뜨릴 뻔한 유혹을 10여차례 겪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일상의 매 순간, 매 시간은 영성수련의 간절한 삶이었으며, 매일이 육신의 유혹과 투쟁하는 수도생활이었고, 가정이 곧 수도원이었다.


 

한편 루갈다는 남편 요한과 상의하여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날이 되면 서너 쪽으로 나누어, 한쪽은 시동생들에게 주어 부모를 봉양하게 하고, 또 한쪽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쓰고, 나머지는 나누어 각자 따로 동정생활을 하는데 사용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3월에 남편이 시아버지와 몇몇 다른 신자들과 함께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시아버지는 서울로 이송되었고, 남편 요한도 전주옥에 갇혔다.

 

9월 15일 무렵에는 루갈다와 나머지 집안 식구들까지도 체포되었다. 마침내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과 작은 시아버지 유관검이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능지처참되었다.

 

10월 6일 임금은 유항검의 두 아들을 교수형에 연좌시킬 것과 가족들을 유배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9일 그녀의 남편 요한과 시동생은 전주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남편의 시신을 거두었더니 입었던 옷에서 '누이에게 부치는 글' 즉 루갈다에게 부치는 편지가 발견되었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처럼 남편 요한이 그녀를 항상 누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도 그들의 철저한 동정생활이 확인된다. 그리고 루갈다도 남편을 '충실한 벗(忠友)'이라고 편지에서 호칭하고 있다.


 

한편 10월 13일 남은 가족이 유배지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평안도 벽동군(碧潼郡)에 비(婢)로 유배형을 받은 루갈다는, 관장(官長)에게 "우리들은 천주를 공경하니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 저도 제 집안 식구들처럼 천주를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청했다.

 

그러나 관장이 끝내 이를 참작하지 않아 귀양길에 올랐다. 전주감영을 떠나 100여리를 갔을 때 갑자기 유배형이 취소되어 그들은 가던 길을 돌려 다시 전주로 와서 옥에 갇혔다.

 

이때 루갈다는 "하마터면 치명(致命)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에 한없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튿날 전주감사의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루갈다를 비롯한 가족들은 하느님을 공경하며 죽기를 원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에 감사가 곤장으로 루갈다의 정강이를 치게 하자 살이 터지고 피가 낭자하였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멎었고, 놀랍게도 4∼5일 뒤에는 상처가 깨끗하게 낫는 이적이 일어났다. 루갈다는 이를 구원의 징표로 생각했고, 나아가 순교를 '다시 더 할 것이 없는 은총'으로 굳게 믿었다.


 

결국 12월 22일 형조(刑曹)에서 루갈다를 비롯한 가족들이 사교(邪敎)에 혹독하게 빠져 형벌에 따라 죽는 것을 마음으로 달갑게 여긴다고 진술했고 요서(妖書)를 선전했다는 이유로 사형판결을 내렸다. 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연좌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선택한 죽음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12월 28일 루갈다는 시어머니 신희(申喜), 시숙모 이육희(李六喜), 사촌 시동생 중성과 함께 전주 숲정이 형장으로 갔다. 형장에 당도하여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루갈다는 정숙하고 품위있게 꾸짖고는 스스로 윗옷을 벗었다.

 

손을 가지런히 몸에 붙인 뒤 맨 먼저 머리를 도끼 밑에 내려놓았다. 꽃다운 청춘 20세의 나이로 루갈다는 편안한 모습으로 참수(斬首)당했는데, 그녀의 목에서 젖빛 같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전한다.

 

그녀의 유해는 전주 제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되었다가 1914년 4월 부활절에 중바위산에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시동생 등의 유해와 함께 이장되었다. 이후 이 산은 치명자산(致命者山) 또는 루갈다산으로 불렸다.

 

한편 루갈다는 옥에 갇혀 있을 때 친정 어머니와 언니, 올케를 위로하기 위해 2통의 서간을 남겼다. 이 편지들은 1802년 1월 서울에서 순교한 큰오빠 이경도(李景陶·1780∼1801)가 순교 전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827년(순조 27년) 6월 27일 전주옥에서 옥사한 남동생 이경언(李景彦·1790∼1827)의 옥중일지 등과 합쳐져서 '누갈다 초남이 일기 남매'라는 제목으로 필사되어 전한다.

 

당시 이 책은 한국 신자들의 중요한 신심서(信心書)로서 대대로 물려가면서 읽혀지고 필사되어 널리 유통되었다.


 

그녀의 편지는 문장이 아름답고 맑고 깊으며 수식과 표현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호소력이 강하고 교훈적이며 정확하고 기품있는 문장으로 알려졌다.

 

편지에서 루갈다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 진정한 효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順命)이라고 강조하여,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를 '효(孝)의 영성'으로 표현했다.

 

또 그녀는 "신망애(信望愛) 삼덕(三德) 즉 믿음, 사랑, 희망을 진실되게 실천하시면 다른 덕은 자연스럽게 따르옵니다"라 말했다.


 

이순이 루갈다는 '매일의 순교'라고 일컬어지던 '동정'과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두 월계관을 쓴 위대한 신앙인으로 존경받는다.

 

나아가 그녀는 '세계 유일의 동정부부'로서 세계교회가 '진주 중의 가장 빛나는 진주'로 찬탄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녀(童貞女)'이다.

 

또한 루갈다는 이후 오랫동안 모진 박해를 견뎌야 했던 초기 한국천주교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던 아름다운 편지글을 남겨 천주교문학의 금자탑을 세운 선구자였다.


김 탁 <철학박사>/http://www.jksm.com/옮김


<사진>결혼은 하였으되 평생을 남매로 살면서 동정생활을 한 루갈다 이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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