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는 로마제국이 임명한 유다의 첫번째 왕이다.
통칭 그에게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후계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그는 기원전 73년에 태어나 기원후 4년에 죽었다.
그의 치세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후 4년을 넘지 못한다.
헤로데는 시나이 반도와 사해 중간에 위치한 에돔(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는 에돔을 희랍어로 음역한 것이다.
그의 부친 ‘안티파트로스’는 부유한 아랍인으로 에돔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해 동쪽에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귀족이었다.
헤로데는 일생을 유다인으로 처신했지만 부계와 모계는 이렇듯 아랍 혈통인 셈이다.
이 사실은 두고두고 그의 정치적 핸디캡이 된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안티파트로스는 로마를 지지했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세력다툼이 생기자 카이사르 편에 가담했다.
그의 ‘줄타기’는 성공했고 카이사르는 안티파트로스에게 로마시민권을 주며 유다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의 신분은 아들들에게도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헤로데는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다.
BC 47년 안티파트로스는 헤로데에게 갈릴래야 통치권을 맡긴다.
정치 시험무대였다.
헤로데는 기대 이상의 수완을 발휘했고 로마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맺으며 인지도를 넓혀갔다.
그러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BC44년)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은 내분에 휩싸인다.
안티파테르는 음모에 걸려 희생되었고 헤로데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로 숨어들어가 재기에 성공한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다 왕’으로 임명하며 군대를 주었던 것이다.(BC37년)
이스라엘의 내분을 수습하라는 주문이었다.
이것이 ‘헤로데 대왕’의 출발이다.
이렇게 되자 36세의 헤로데는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유다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고
32년 동안 모든 수완을 동원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냈다.
왕이 된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대립했을 때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BC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와 함께 제거되고 만다.
이후 실권은 옥타비아누스가 잡았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다.(루카 2,1)
헤로데는 즉시 잘못을 고백하며 처분을 기다린다.
그러나 냉정한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받아준다.
로마가 원하는 대로 팔레스티나를 끌고 갈 인물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헤로데는 다시 한 번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신은근 신부(바오로, 호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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