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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박해 (1795년)
- 2시간에 쉽게 읽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수난사』(1784~1886) 중에서 -1. 개요1795년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정조의 주문모 신부 체포령이 내리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영익의 수상한 행동을 의심히 여기고 추적한 열심한 교우의 활동으로 포도청 포교들이 주 신부 집을 덮쳤을 때는 이미 주 신부는 대피하였고 역관으로 중국어를 잘하는 최인길(마티아)이 신부인 척하며 대신 잡혀갔고 그날 윤유일, 지황도 같이 잡히었다. 포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하여 사정없이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으나, 세 사람이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자 다음날(1795년 6월 28일) 포도청 뜰에서 세 사람을 사정없이 때려 숨지게 하였다. 그들의 시체는 바로 한강에 버려졌다. 이들 세 사람은 현재 수원교구에서 시복을 청원한 상태이며 1987년 9월 15일 축복식이 거행된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마을)에 이들의 가묘가 모셔져 있다.2. 윤유일(바오로)윤유일은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1784년 세례를 받았으며 1789년 이승훈과 다른 신자의 편지를 갖고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도착하여 조선에 천주교회가 탄생하였음을 세상에 알렸다. 라자로회 소속의 로(Raux) 신부로부터 세례를 다시 받고 구베아 주교로 부터 한국인 최초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윤유일은 초기 조선교회가 궁금해하던 것에 관한 37개 항목의 질문을 로 신부에게 하였다고 한다. 로 신부는 윤유일이 한글로 적은 '주님 의 기도'를 라자로회 본부에 보냈고, 이 최초의 한글 '주님의 기도'는 현재 런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구베아 주교는 한자로 8천여 자에 이르는 사목교서를 윤유일을 통해 조선교회에 보냈다. 윤유일은 그 후 1795년 1월 3일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압록강을 건너 이 땅에 성직자를 모시고 오는 큰 역할을 수행 하고 순교하였다.3. 최인길(마티아)최인길은 1784년 이벽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을사 추조적발사건 때는 김범우(토마스0와 같이 처발받기를 자원하여 옥 에 갇혔다가 매만 맞고 10일만에 풀려났으며 1791년 신해박해 때에 도 체포되었다가 풀렸났다. 최인길은 일찍부터 신덕이 깊어서 이승훈이 교회를 창설하던 때부터 조선교회 사상 최초의 전교회장을 역임하엿고 우리말을 못하던 주 신부의 통역을 맡아 성무를 집행하는데 최선을 다해 보좌하였고 주 신부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 * 밀고자 한영익은 밀고한데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1796년 여행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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